기본소득의 질문들

"이처럼 장밋빛으로 그려지는 이상적인 이야기는 현실의 복잡한 맥락 속에서는 결코 쉽게 적용될 수 없다"
특정 산업 분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천문학적인 이윤을 창출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와 함께 필연적으로 논의되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기본소득'이다. 또는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모든 국민이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국가가 일정한 소득을 지급한다는 이러한 사고는 언뜻 보기에 당장 매혹적이며, 국가 단위로 시행된다면 국민 누구나 대상으로 선정되어 기본소득을 누리는 이상적인 제도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그러나 이처럼 장밋빛으로 그려지는 이상적인 이야기는 현실의 복잡한 맥락 속에서는 결코 쉽게 적용될 수 없다. 우리는 현실의 냉엄한 질문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당장 머릿속을 맴도는 몇 가지 본질적인 물음들이 있다.
가장 먼저, 기본소득의 '대상 범위'에 대한 문제에 봉착한다. 과연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이 소득을 지급해야 하는가? 사실 태어난 국적부터 따져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출발점일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거나 출산을 통해 국가에 기여하고, 또는 경제활동을 통해 세금을 납부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 공동체에 기여해 왔다. 하지만 만약 한 외국인이 해외에서 오랜 기간 살다가 한국을 국적으로 선택하여 들어오는 경우, 대한민국 태생의 국민들에게 이 외국인은 '기본소득 무임승차자'로 비춰지지 않을까? 기본소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차별 없는 보편적 권리라고 주장되지만, 우리는 아직 이러한 정서적 합의를 충분히 마친 적이 없다. 더 나아가 국내에 장기간 취업이나 학업 등 다양한 사유로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기본소득을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역차별'의 문제이다. 기본소득은 말 그대로 기본적인 소득이다. 이는 사유재산이 침해받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에게는 기존 지출을 줄이는 기회로 작용하여 사유재산의 빠른 증식을 불러올 수 있다. 과연 이것을 역차별로 보아야 할까? 그렇다고 부자에게는 적은 금액을 주거나 아예 지급하지 않는 방식은 또 다른 형태의 역차별을 초래할 것이다. 만약 첫 번째 논의에서 외국인에게는 기본소득을 지급하면서, 내국인 중 부자에게는 지급하지 않는다면 이는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국가는 자국민을 우선적으로 보호하고 이익을 도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지급할 것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수 차례에 걸쳐 '재난지원금' 명목으로 기본소득에 유사한 단발성 현물 지원을 해왔다. 이는 주로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큰 틀 아래에서 지역화폐의 형태로 지급되어 사용처가 제한되었다. 그런데 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기본소득은 우리가 '소득'으로 인식한다. 만약 월급을 특정 거주 지역에서만 사용해야 한다고 강제한다면 이는 명백한 사유재산 침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은 전국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하게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일부는 기본소득마저 저축하며 부를 축적하고자 할 것이고, 이러한 현상이 대다수 국민에게서 나타나 근면한 저축만 이루어지고 실제 경제 활성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부는 사용의 강제를 위해 다시 지역화폐 등으로 제공할 수 있을까? 혹은 모든 기본소득이 주식시장의 단일 레버리지 상품으로 흘러들어 가는 우려를 막는다는 이유로 지역화폐로 제공된다면, 우리는 이러한 제한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다음은 '재원 마련'의 지속 가능성 문제이다.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인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지속 가능한 막대한 재원이 뒷받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연 이 재원이 무한할까? 만약 오늘날 논의되는 특정 반도체 기업과 같은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의 이익에 기반해서 기본소득을 논의하는 것이라면, 이는 정부가 기업의 본질적인 목적과 자율성을 통제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기업의 목적이 근본적으로 지속 가능한 이윤 창출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만약 '기본소득'이라는 대의를 위해 정부가 일정 요건 이상의 기업에게서 강제적으로 돈을 걷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정부를 비판해야 할까? 아니면 지속 가능한 정부 정책을 위한 것이므로 정부를 지지해야 할까?
마지막으로, 이는 가장 깊이 고민한 부분이다. 우리는 대부분 직장을 가지거나, 자영업을 하거나, 또는 비정규직, 시간제 등 다양한 형태로 '일'을 하며 살아간다. 어느 순간부터 통장 또는 카드 내역에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일정한 돈이 입금된다면, 과연 모두 자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를 절하하지는 않을까? 여지껏 일하는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살아온 우리에게 어느 순간부터 일에 대한 가치가 퇴색된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남게 될까? 이 질문은 단순한 경제적 논리를 넘어, 인간 존재의 의미와 사회적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그날 저녁, 강연장의 열기는 마치 거대한 환상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저명한 석학은 인류가 마침내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시대가 도래했음을 역설했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고, 청중의 눈은 희망으로 빛났다. 나 역시 그 달콤한 상상에 잠시 취해 있었다. 모든 이에게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고, 창의성과 여가가 넘쳐나는 유토피아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그러나 강연장을 나서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는 순간, 그 환상은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머니 속 휴대폰에서 날아든 카드 명세서 알림이 현실의 무게를 상기시켰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 늦은 시간까지 묵묵히 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 그리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피곤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삶과 방금 들었던 이상적인 미래 사이에 놓인 간극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집으로 돌아와 잠 못 이루는 밤, 나는 노트 한 권을 펼쳤다. 과연 이 아름다운 약속은 누구에게 유토피아일까?라는 질문이 맴돌았다. 국적을 달리하는 이웃, 부를 이미 이룬 이들, 그리고 평생을 일의 가치에 매달려 살아온 우리 자신에게 이 제도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강연에서 미처 다루지 않았던, 혹은 의도적으로 회피했을지도 모를 날카로운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질문들은 단순히 경제학적 분석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근간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요구했다. 결국 나는 이 질문들을 글로써 풀어내야겠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이상에 가려진 현실의 그림자를 밝히고, 우리가 함께 답을 찾아야 할 진정한 숙제를 세상에 던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