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질문: 고통이 사라진 시대, 초인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고통이 사라진 시대, 초인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프리드리히 니체의 『아침놀』 114장은 고통이 진리를 벼려내는 시선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니체가 펼쳐 보이는 이 사유의 전개는 파격적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객관적인 면모를 지닌다. 우리는 이 명제 앞에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짐작건대, 고통의 심연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시선은 경멸을 먹이 삼아 날카로운 칼날처럼 작동하지만, 언젠가 고통이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칼날 같은 경멸의 시선마저 멀리하고 결국 근원적인 인간성과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사유를 따라간다면, 삶에 있어서 진정한 초인(Übermensch)이 되고자 하는 존재는 죽음에 필적할 만한 고통을 필연적으로 수반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적인 고립과 같은 인간성의 근본적인 붕괴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고통의 한복판에서 살아남고, 다시금 저 높은 곳을 향해 기어서라도 올라가는 자들에게 비로소 위대한 초인이라는 칭호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는 과연 이토록 깊고 날카로운 경멸을 지닐 수준의 고통이 존재하는가? 모두가 안락함과 평화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니체가 말하는 의미의 초인은 과연 탄생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신을 죽인 살인자에서 나아가, 고통의 부재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극복할 기회마저 상실한, 자아를 죽인 연쇄살인범으로 변모한 것은 아닐까 하는 섬뜩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고통 없는 안락함 속에서 무엇을 잃어가고 있으며, 무엇을 얻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받고 있다.
그날 밤, 나는 오래된 가죽 소파에 몸을 파묻고 니체의 『아침놀』을 펼쳤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끊임없이 반짝였고, 귀로는 이웃집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드라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안락하며, 심지어는 지나치게 완벽한 듯했다. 바로 그 순간, 114장의 문장이 내 눈에 박혔다. 고통이 진리를 만들어내는 시선. 나는 문득 주변의 풍경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토록 고통이 부재한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진리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아니, 애초에 진리라는 것이 고통 없이도 제 스스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인가? 그 질문은 마치 얼어붙은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내 안에서 파동을 일으키며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파동이 닿는 곳마다, 나는 오늘날 우리가 초인이라 부를 만한 존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무엇을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