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추모 의식: 희생을 기리는가, 통제를 강화하는 죽음정치인가?

"국가의 추모 의식은 희생을 기리는가, 아니면 통제를 강화하는 죽음정치인가"
국가는 특정 역사적 사건이나 군사적 충돌에서 발생한 희생을 기리는 엄숙한 순간들을 지정하여 기념한다. 3.1운동과 6.25전쟁과 같은 거대한 역사적 변곡점부터, 연평도 포격전이나 제2연평해전처럼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군사적 충돌까지, 이 모든 순간은 국가 차원에서 깊은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기념일이 다가오면 국가는 전국에 사이렌을 울리고, 대규모 추모식과 다채로운 행사를 거행하며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고 아픔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엄숙한 약속을 대내외에 선포한다. 이 모든 의례적 장면은 주요 방송사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며 국민의 시선을 강력하게 사로잡는 장치로 활용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는 이러한 전통적인 장례, 제사, 추모 문화가 그리 긍정적인 인식을 주지 못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합리성과 실용주의를 핵심 가치로 여기는 이 세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을 향한 형식적인 예우를 조금 줄이더라도, 현재를 살아가는 생존자들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을 늘리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시각을 지배적으로 표출한다. 명절에 "조상을 잘 만나면 해외여행을 가고, 잘못 만나면 제사상 차리느라 고생한다"는 유행어가 널리 퍼지는 것 또한 이러한 세대론적 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국가적 재난이나 희생을 대할 때만큼은 '잊지 않겠다'며 강렬한 애국적 태도를 보이곤 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적인 지점에서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이러한 정서가 은연중에 강요된 국가 차원의 정서적 폭력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사회학에는 '죽음정치(Necropolitics)'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이는 통치 권력이 마땅히 죽어야 할 자, 혹은 희생되어야 할 자를 규정하고 이를 통해 국가 체제를 존속시키며 통제력을 강화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을 의미한다. 국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호화로운 추모 행사를 주관하고 이를 전국으로 생중계하는 본질적인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당사자에게는 아무리 호화로운 장례를 치르거나 사후의 명예를 드높인다 한들, 그것이 물리적으로 직접 닿을 리 만무하다. 결국 이러한 화려하고 거대한 의식은 살아있는 다음 세대에게 "국가를 위해 희생하면 이토록 명예로운 대우를 받는다"는 인식을 주입하여, 잠재적 희생을 정당화하고 새로운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권력의 정교한 기제에 가깝다.
이러한 죽음정치는 국가 간의 전면전에 비하여 규모가 작은 사고나 국가의 관리 소홀로 발생한 참사에서 더욱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국가는 희생을 기리고 추모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정작 사건의 본질인 '국가의 책임 소명'과 '책임자 엄벌'이라는 중요한 논점을 의도적으로 흐린다. 슬픔을 국가적 의식으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구조적 모순은 은폐되기 쉽고,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손쉽게 희석된다. 진정한 애국심은 타인의 죽음을 도구 삼아 강요되는 정서가 결코 아니다. 국민이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안전함을 느끼고 소속감에 자부심을 가질 때, 비로소 건강하고 자발적인 애국심이 견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
몇 해 전, 한 국가적 추모식이 끝나고 텅 빈 광장을 서성이던 때였다. 거대한 전광판에는 방금 전까지 울려 퍼지던 추모곡의 잔향이 채 가시지 않은 듯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섬뜩하리만치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 순간, 내 시선은 광장 한편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운동화 한 켤레에 닿았다. 누군가의 손때 묻은 운동화 옆에는 빛바랜 국화 한 송이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아빠, 보고 싶어요'라고 적힌 작은 쪽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소박하고 개인적인 슬픔의 흔적은 방금 전까지 장엄하게 펼쳐졌던 국가의 거대한 의례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국가의 추모 의식은 늘 한편의 잘 짜인 연극 같았다. 엄숙한 표정의 지도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의장대, 그리고 정제된 슬픔을 강요하는 듯한 애국가.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산된 듯 움직였지만, 정작 그 안에는 희생자의 개인적인 삶이나 유가족의 찢어지는 고통이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그들은 그저 국가라는 거대한 서사의 한 페이지를 채우는 '도구'로 소비되는 듯했다. 화려한 장막 뒤에 가려진 채, 홀로 남겨진 이들의 절규는 국가의 웅장한 목소리에 쉬이 묻히곤 했다.
그 낡은 운동화와 쪽지를 보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국가가 '잊지 않겠다'고 외치는 것은, 어쩌면 진정한 기억이나 책임과는 거리가 먼, 살아남은 자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제하고 길들이기 위한 정교한 수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직감이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을 기리는 척하며, 사실은 산 자들에게 특정한 가치와 행동 양식을 주입하고 있었다. 희생을 '숭고한 애국'으로 포장하여, 또 다른 희생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방식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국가의 추모 의례를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텔레비전 화면 가득 추모의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나는 광장 한편에 놓였던 낡은 운동화와 그 옆의 작은 쪽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묻는다. 이 슬픔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과연 우리는 무엇을 잊지 않으려 하는가.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화려한 의식 뒤에 숨겨진 개인의 고통과 국가의 무책임은 아닐까. 이 글은 바로 그 질문의 시작이었다.